사업을 하면서 바쁘게 살다보니 때로는 본의 아니게 잃게 되는 것들이 많다.
필리핀에서는 성탄절부터 다음해 연초까지 이어지는 12-13일간의 긴 휴가 기간을 맞게 된다.
성탄절에 이어 년말 까지는 교회 행사 등에 참여하여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 일 중독증에 빠졌다는 아내의 잔소리를 들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새해 첫 날부터 출장 일정을 잡았다.
계획을 세우면 항상 쫏기는 것 같은 조급함이 나 자신을 그냥 집에서 푹 쉬도록 놓아주지를 않는다.
출장지는 민다나오섬 오지다.
항공편으로 다바오까지 가서 차량을 이용하여 4시간을 가야하는 고된 출장길이다.
직원 한 사람과 더불어 1박 2일의 일정으로 떠난 출장길.
필리핀의 한 섬에서 2009년 신년을 맞는다.
해외에서 살아가는 한국 사람은 누구나 느끼는 것이겠지만, 우리 한민족의 큰 명절인 설날과 추석은 때로는 형편상 난감한 날일 수도 있다.
중화 문화권에서는 상황이 조금은 다르겠으나, 의외로 설날이나 추석날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는 나라들이 많다.
상황이 그렇다보니 명절이라고 꼭 집에서 쉴 수만은 없다.
올해의 구정엔 새벽 4시부터 부산을 떨며 아내의 걱정 소리를 뒤로 하고 출장길에 올랐다.
모처럼 서울에서 구정 휴가를 얻어 큰아들과 손자가 집에 와 있는데도 말이다.
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중동 출장을 앞두고 있어서 부득이 날을 그렇게 잡을 수 밖에 없었다.
항공편을 이용하고 뱃길로 3시간을 가야하는 고달픈 여정이다.
명절날이나마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갖고자 되도록이면 그런 특별한 날엔 출장을 피하려하지만 상대방의 요청이나, 일정에 맞추다보면 올해처럼 어쩔 수 없이 신정, 구정을 모두 외지에서 맞는 상황도 일어나는 것이다.
오늘은 내 생일날이다.
어제 정오 경 집을 떠나 이곳 중동땅에 도착하여 현지 시간 밤 10시에 호텔에 짐을 풀었으니 15시간의 긴 여정이다.
피곤하여 곧 잠에 빠졌으나, 새벽 5시 경의 아잔(무스림들이 기도시간을 알리는) 소리에 잠이 깬 후 더이상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킨다.
마닐라 시간으로 오전 10시이니 시차 때문에 잠이 달아나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.
호텔 식당의 첫 손님으로 생일날 아침 밥을 혼자서 먹는다.
문득 아내가 집을 나서는 나에게 혀를 차며 한 말이 기억난다.
'생일이라도 지난 후에 출장 일정을 잡을 것이지 하필이면 생일 전 날에 집을 나서는 것은 또 뭐냐고.'
그 말을 기억하며 혼자서 피식 웃는다.
이 나이에 갈 곳도 많고 할 일도 많다는 것이 큰 축복 아닌가 생각하며 이른 새벽 서둘러 회사 출근길에 오른다.